이번 방학동안 나의 뇌 구조도를 그려보면
그 중 팔 할이 야구일 것이다.
나의 야구사랑을 거슬러 올라가자면
그건 고등학교 때부터이다.
나의 몸을 움직이는 건 죽도록 싫어했으면서
남이 몸을 움직이는 것엔 언제나 열광했다.
농구대잔치 시절 0.1톤의 아기코끼리에게
실력만큼은 주목받지 못하던 오리를 닮은 1번타자에게
배구가 인기종목이었던 그 마지막 시대를 이끌었던 스타플레이어에게
아낌없는 사랑을 퍼부었다.
늘 삶의 중심을 “공부”에 내주어야 했던 고등학교 시절에는
내 마음을 모두 쏟아낼 그 무언가가 필요했다.
나한테는 그게 농구였고, 야구였고, 배구였던 것이다.
대학에 진학한 후에는
여기저기 관심을 쏟을 수 있는 선택권이 스스로에게 주어졌기 때문에
지리멸멸한 나의 삶에 집중하느라
옛사랑들과는 자연스레 멀어지게 되었다.
어쩌다 보니 1년에 한번씩은 꼭 야구장이나 농구장을 찾게 되었지만
그건 스포츠에 대한 애정이라기보다는
나의 옛 추억을 곱씹어보기 위함이었다.
작년 시종일관 꼴찌 언저리에서만 맴돌던
나의 홈팀이 드디어 4강에 들어서 목이 터져라 염원하던 가을야구를 하게 되었다.
웃음도 안 나올 정도로 허탈하게 끝났던 가을야구였지만 말이다.
야구 보러 가자는 친구의 권유를 거절하기 뭣해서 찾았던 야구장에서
오랜만에 소리 지르고 노래하며 응원의 희열을 느꼈고
선수들의 플레이에서 그 보답을 받았다.
출근하면 꼭 전날 경기의 하이라이트를 챙겨보며
오늘의 승리를 기원했다.
모두를 똑같이 사랑하고 아끼려 했지만
유독 눈에 들어와 박히는 녀석이 있어서
그 녀석만 특별히 10%쯤은 더 챙겼다.
국대에 뽑혀 그 큰 경기들을 뛰며 자신의 가능성을 보여줘서 기특했고,
철없고 가벼운 언행들이 귀엽기도 했고 창피하기도 했다.
올해
나 이 녀석 때문에 웃기도 하고 울기도 한다.
롯데의 승패 때문이 아니라 이 녀석 때문이다.
팀이 패한 모든 경기의 원흉으로 지목되고 있는 녀석이라
작년에 보여줬던 가능성마저 모조리 평가절하당하고 있는 녀석이라
경험 많은 선배와 재능 있는 후배 틈바구니에서 치이고 있는 녀석이라
잘하라고 까는 거라며 인격모독성 저주글도 서슴지 않는 팬 아닌 팬들 때문에
가슴에 박혀 절대 빠지지 않을 모진 말들을 들어야 하는 녀석이라
마음이 안쓰러워 그런다.
녀석이 지금 느끼고 있을
누군가에게 뒤처지는 기분
다들 나를 알아주지 않음에서 오는 좌절감
손에 잡힐 만큼 생생하게 다가와서
이 녀석만 보면 울컥한다.
야구가 취미생활을 넘어서면 안되는데...
그깟 공놀이가
이렇게까지 나의 삶에 많은 부분에 관여하면 안되는데...
바닥을 치고 있는 그 녀석의 모습에서
나의 가슴 속 깊숙이 숨겨뒀던 열패감이 표면으로 드러나는 듯해
마음을 다친다.
녀석이 이 모든 성장통을 이겨내길
야구장 한 귀퉁이에서
TV 앞에서
모니터 앞에서
두 손 모아 간절히 바래본다.
덧)
딱 이번까지만 남의 인생에 감정이입하고
내년에는 안 그럴 테니까...
정말 100% 취미생활로만 즐길 테니까...
남은 경기에서
그 녀석 대박 활약하고
가을야구 하는 걸로 결론내주면 안될까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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