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1. 2. 28. 20:28 카니발인생
나탈리 포트만의 <블랙 스완>
무엇보다 <백조의 호수>였던 것이 중요했다. 애로노프스키가 어느 날 우연히 보러 간 발레극이 <호두까기 인형>이나 <지젤>이었다면 이 영화는 성사되지 못할 프로젝트였다. 도스토예프스키의 장편 소설 <분신>을 어떻게 영화로 만들면 좋을까 구상 중이던 애로노프스키가 발레극 <백조의 호수>를 보게 되면서, 백조와 흑조를 한명의 무용수가 한다는 사실을 알고 나서 <블랙 스완>은 성사된 것이다. 때문에 <블랙 스완>의 방점은 이 영화가 단지 발레에서 그치는 것이 아니라 <백조의 호수>라는 점이다. 그러니 이야기의 구조는 이렇게 완성되어갔을 것이다. <백조의 호수>에서는 백조와 흑조를 한 사람이 하게 된다, 그렇다면 그걸 하는 주인공은 두개의 자아를 가져야만 하는 것은 아닌가, 그 주인공의 강박이란 과연 어느 정도일까, 그 강박을 몰아붙여 본다면 그녀에게는 무슨 일이 생겨날까, 그리고 그건 영화에서 어떻게 표현되어야 하는 것일까.
- 씨네 21 중
***
오늘 아카데미 시상식이 있었다. 난생처음으로 수상자 명단을 찾아봤다. 역시.. 여우주연상은 나탈리 포트만이 가져갔다. 이건 정말 완벽히 그녀만의 영화이다. <클로저>라는 그 난해한 영화를 보고 난 후 유일하게 마음에 남은 건, 카메라를 정면으로 응시하며 타인들을 헤치면서 걸어오는 그녀의 모습이었다. 미친 존재감은 정말 이럴 때 쓰는 말인 것 같다. 영화 속 그녀는 "perfect"하다.
순수하고 겁많은 니나가 어머니에 의해 억압당하던 자신의 성을 깨어부수고 결국 자기 스스로 목을 조르는 파국으로 치닫는 동안, 단 한순간도 스크린에서 눈을 떼지 못하면서도 나는 영화가 그만 멈추기를 바랬다. 무언가에 대한 열망과 그것으로 인해 생기는 온갖 불안, 강박 때문에 점점 위태로워지는 그녀가 안쓰러워서 그녀의 행보도 영화도 다 멈추기를 바랬다. 완벽함 그 뒤에 남은 결말은 어쩌면 정해진 것이었을지도 모르니까. 어느 평론에 그런 말이 있었다. "<블랙 스완>은 걷잡을 수 없이 불타오른 욕망에 산화된 자를 기리는 장송곡이다"
영화는 시종일관 팽팽한 긴장감 속에서 진행된다. 니나가 마주치는 또 다른 나들은 공포스럽기까지 하다. 초반부터 서서히 스며들던 환상들이 현실과 마구 뒤엉켜 버리고, 사회적으로 금기시되는 성적 코드들이 죄다 등장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영화가 불편하지 않은 이유는 그 모든 것이 그녀가 열망하는 블랙스완이 되어가는 과정이기 때문이다.
결국 니나의 마지막 대사는 완벽이란 것은 세상에 존재할 수 없다는 것을 말하는 걸까? 다시 한 번 영화의 마지막 장면이 주는 압도적인 카리스마를 느껴보고 싶다.
***
대런 애로노프스키 감독을 아는 관객이라면 애당초 <블랙 스완>이 도저한 발레 예술의 세계를 탐사하는 영화일 거라고 기대하지 않았을 것이다. 거의 종교적인 헌신을 요구하는 이 가혹한 예술 장르를 향한 경외감이나, 입이 떡 벌어지는 무대를 보여주려는 야심은 애로노프스키의 안중에 없다. 매튜 리바틱의 촬영은 무용수들의 전신과 움직임을 조화롭게 담는 대신, 긴장으로 핏줄이 불거진 얼굴과 통증어린 관절의 꺾임에 주목한다. 즉, 완벽한 결과물이 아니라 완벽해지려는 강박으로 내파되는 육체와 정신. 그것이 심리스릴러 <블랙 스완>의 회전축이다.
뉴욕의 발레리나 니나 세이어(내털리 포트먼)는 선배 프리마돈나 베스(위노나 라이더)가 은퇴를 맞자 <백조의 호수>의 주역 오디션에 도전한다. 발레단 예술감독 토마스(뱅상 카셀)는 니나가 백조로서는 흠잡을 데 없지만 흑조의 관능을 표현하기엔 부족하다고 여긴다. 공연이 다가올수록 열망과 중압감에 짓눌린 니나의 정신은 분열하고 몸은 변이를 일으킨다. <블랙 스완>은 예술가 영화와 익스플로이테이션영화, 그리고 연속극과 소녀만화에서 숱하게 반복된 상투형을 서슴없이 끌어다 쓰면서도, 독창성과 활력을 보존한다. 한편 깡마르고 피폐한 내털리 포트먼의 모습은 퍼포먼스와 삶을 맞바꾼 니나의 역경이 배우의 것이기도 했음을 짐작하게 한다. 니나는, 그녀가 갖지 못한 자질을 대변하는 동료 릴리, 자신의 미래가 될지도 모르는 몰락한 프리마돈나 베스, 그리고 야심을 딸에게 투사하는 어머니를 통합해 완벽한 자아를 완성하려고 몸부림친다. 하지만 정작 중심이 비어 있는 이 노력은 불가피하게 자살에 가까워진다. <블랙 스완>은 깨진 거울 같은 영화다.
- 김혜리, 깨진 거울 같은 영화 <블랙 스완>
'카니발인생' 카테고리의 다른 글
[문학동네리뷰] 또 다른 한 해를 꿈꿀 수 있기를 (0) | 2013.12.02 |
---|---|
my favorite voice : 옥상달빛 (0) | 2012.02.12 |
김훈 <내 젊은 날의 숲> (0) | 2011.02.20 |
늦은 인사지만, 그곳에서 편히 쉬시길... (0) | 2011.01.27 |
은희경 <소년을 위로해줘> (0) | 2011.01.20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