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2. 2. 12. 15:36 카니발인생
my favorite voice : 옥상달빛
내가 세 살 때 이사가서 무려 27년을 살았던 그 집은 방이 세 개였다. 부모님이 한 칸, 아들이 한 칸, 그리고 딸 셋이 한 칸에 아웅다웅 지냈다. 자식들이 대학생이 된 후에는 어학연수나 군대, 결혼 등의 이유로 오롯이 모두 함께 사는 시기가 얼마되지 않게 됐지만, 그래도 내 서른 인생에서 나의 방을 가져 본 건 한 3년 남짓 되려나. 아무튼 그 땐 좁은 건 둘째치고 사생활을 보장받을 수 없다는 사실이 무엇보다도 불편했다. 감수성 그래프는 널뛰기하듯 오르락내리락했고, 하찮은 것이지만 말하고 싶진 않았던 일들이 차곡차곡 쌓이던 학창시절이었다. 세 딸은 끊임없이 투닥거릴 수 밖에 없었다.
학교를 마치고 저녁까지 두둑히 먹고 난 후 방 안에서 뒹굴거릴 때면 큰언니는 라디오를 틀었다. 지금도 언니가 좋아했던 이승연이나 고소영이 진행하던 프로그램이 어렴풋이 기억난다. 그 땐 시끄럽다며 투덜거렸는데, 언제부터인가 언니의 하교가 늦은 날이면 내가 라디오를 틀고 있더라. 조금 더 자라서는 내가 선택한 주파수에서 나를 정신없이 흔들어댔던 목소리들을 만나게 됐다. 윤상, 유영석, 김현철, 이적, 김동률, 유희열... 누군가는 학업의 능률을 따져대기도 하지만, 그래도 인생에서 가장 라디오 듣기 좋은 시절은 누가 뭐래도 고등학생 때이다. 물론 나도 또래 아이들이 좋아했던 가수들에게 열광했다. 나도 시대의 아이콘 서태지의 음악을 사랑했으며, 없는 용돈을 쪼개 신승훈의 앨범을 구입했고, 젝키빠(장수원!) GOD빠(윤계상!)였다. 그러면서도 틈나는 대로 이어폰을 꽂고 그들의 목소리를 들었고, DJ들의 감성과 맞닿아 있는 음악들에 감동했다. 내가 가장 사랑했던 건, 라디오를 통해 드러나는 그들의 내밀한 속내였다. 진부한 말 같이 들리겠지만, 라디오는 정말 친구였다. 나의 하루가 행복했건, 우울했건 버튼 하나만 누르면 한결같이 그 자리에서 나를 맞아주는 따뜻한 친구였다. 나의 현실에 버티고 선 친구는 아니었지만, 그 때 난 그런 친구를 원했고 지금도 원하고 있다. 자존심 세고 변덕스러운 나를 한결같이 지지해주는 사람... 적어도 그 땐 라디오가 그랬다.
내가 가장 사랑하는 라디오스타는 유희열이다.(요즘은 TV 음악쇼도 진행하지만, 웬일인지 그건 챙겨보지 않게 된다. 화면 속에서 만나는 그는 늘 낯설다.) 그는 러브 액츄얼리에서 엠마 톰슨이 했던 대사를 자주 말했다. "촌스럽던 나에게 정서를 가르쳐 준 것은 이 음반이었어요." 그리곤 자신의 정서를 만들어 줬던 유년시절의 기억을 담담히 털어놓곤 했다. 지금 나의 정서를 만든 건... 라디오다. 그 중 팔 할은 디제이유의 정서이고. 가끔 그런 생각을 한다. 누군가를 만나는 자리에서 늘 무미건조한 나지만, 어떤 남자가 디제이유의 라디오를 들으며 자랐다고 말한다면... 난 그 사람을 사랑하게 될 지도 모른다고... 그건 그 남자와 나의 어느 부분이 맞닿아 있다는 뜻이니까. 결국 난 어쩔 수 없는 라디오키드다.
요즘도 라디오를 듣는다. 6시에는 일어나서 출근 준비를 해야 하는 직장인이 된 이후부터는 심야 라디오를 제 시간에 챙겨듣는 건 꽤 힘든 일이 되었다. 그는 잊을 만하면 다시 돌아와줬고, 난 그의 목소리를 영접하기 위해 인터넷을 뒤져 라디오 파일을 찾아냈다. 항상 나의 mp에는 라디오 파일이 들어있고, 혼자 긴 시간 그의 목소리에 집중할 수 있을 때 꺼내어 듣곤 한다. 그는 지난해 늦가을 다시 이별했으며, 나의 늦은 복습은 서서히 그 시간을 향해 가는 중이다.
그가 3년을 이끌어 온 <라디오천국>이 나에게 남긴 것은 무수히도 많지만, 그 중 가장 큰 수확은 누가 뭐래도 "옥상달빛"의 목소리였다. 매주 수요일 야한 목소리의 10cm와 노래 배틀을 벌이던 그녀들은 이전에는 전혀 알지 못했던 가수였다. 원래 나의 오랜 습성상 보통은 이런 대결구도에서는 남성 쪽에 마음이 기울기 마련인데, 신기하게도 거듭 리플레이하게 되는 건 그녀들의 목소리였다. 일상의 소리를 차단하고 라디오 속 목소리에 귀를 기울이던 나에게 필요한 건... 괜찮다고, 그래도 혼자는 아니라고 토닥여주는 따뜻함이었을 것이다. 그녀들은 조금은 비어있는 노래에 청아한 음색을, 기묘하게 쓸쓸한 화음을 입혀 나를 위로해줬다. 그녀들의 앨범을 다운받고, 듣고 또 들었다. 작년 나를 가장 행복하게 해줬던 가수는 그녀들이다.
고맙고 또 고맙다.
그녀들의 목소리가 고맙고,
이런 그녀들을 알게 해 준 그가 고맙고,
아직도 한결같은 친구가 되어주는 라디오가 고맙다.
결국 난 어쩔 수 없는 라디오키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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