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9. 12. 5. 10:30 카니발인생
김진규 <달을 먹다>
이른 아침이었고, 겨울이었다. 뭐든 감추기에 좋았다.
이 세상에 더 이상 새로운 이야기는 없다. 소설만 집중적으로 읽어가는 나로서는 참 공감하는 말이다. 이야기들은 어딘가 모르게 닮은 꼴을 하고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재미있는 이야기와 그렇지 못한 이야기의 경계는 나눠진다. 나는 바로 거기서 작가의 역량이 드러난다고 생각한다. 수업시간에 소설을 가르치다보면 구성, 시점, 표현기법 이런 걸 분석하게 된다. 학창시절에 수업을 들으면서 '대체 이런 게 무슨 의미가 있지?', '소설을 왜 분석하면서 읽지?' 라는 생각을 했더랬다. 도리어 쓸데없는 분석이 문학의 열린 감상을 방해하고 있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나는 여전히 1인칭 관찰자시점이 나오면 <사랑손님과 어머니>의 예를 들며 시점의 특징을 언급, 정리해주고 있다. 별 시덥잖은, 사랑이라고 부르기에도 찝찝한 그들의 이야기가 빛나고 있는 건 분명 시점의 승리이니까. 책을 한 권씩 읽어내려갈수록 시점, 구성, 문체 같은 요소들이 새로울 게 없는 이야기를 매력적으로 탈바꿈시키기는 데 얼마나 큰 역할을 하는지 새삼 깨닫게 된다. 제 13회 문학동네소설상 수상작, 김진규의 <달을 먹다> 역시 마찬가지다.
깊은 밤이었고, 봄이었다. 미치기에 좋았다.
"<달을 먹다>는 정조시대를 배경으로 다양한 인간 군상의 연애와 결혼에 대한 이야기를 담고 있는 작품이다. 전체가 네 토막으로 나뉘어져 있고, 각 토막마다 여러 명의 화자가 등장하여 이야기를 풀어나가는 형식이라, 처음에는 잘 읽히지가 않았다. 시점이 다양한데다 등장 인물이 많아 이야기의 줄거리를 잡아가기 힘들었던 탓이다. 하지만, 중반으로 접어들어 서사의 가닥이 잡히면서부터는 이런 플롯이 지니고 있는 장점들이 제 모습을 드러내기 시작했다. 동일한 사건을 두고 서로 다른 화자들의 교차하는 시선이 만들어내는 다채로운 아이러니를 즐길 수 있게 되었다. 자연스럽게 읽는 속도도 느려졌고, 그러면서 이 소설이 지니고 있는 정서의 흐름과 호흡을 맞출 수 있게 되었고, 중반부를 넘어서면서부터는 완벽하게 몰입해 있는 나 자신을 발견하게 되었다. 그러다 문득 주변을 둘러보니 조선시대 사람들의 감정생활이라는 매우 이색적이고 독특한 세계가 펼쳐져 있었다. 그것이 <달을 먹다>의 세계였다."
- 문학평론가 서영채
한낮이었고, 여름이었다. 넘치기에 좋았다.
이 작품을 수상작으로 선정하면서 박완서씨는 작가가 보여주고자 하는 큰 그림을 보려면 무질서하게 흩어진 퍼즐조각을 맞춰야 하는데, 그걸 다 맞추고 난 뒤에도 완성의 기쁨이 별로 느껴지지 않는다고 했다. 또한 작품 전체가 살아있는 유기체인 느낌이 들지 않는다 했다. 하지만 나는 그런 점이 이 작가만이 지닌 강점이라 생각한다. 신인작가의 작품이다. 그 정도의 단점은 앞으로의 가능성을 위해 덮어둬도 좋지 않을까. 작가가 보여주고자 한 그림은 마치 정물화같다. 작가가 작품 곳곳에 관여하며 인물들을 이야기를 토막토막 들려주지만 독자에게 무언가를 느껴라 강요하고 있지는 않다. 인물들은 열망에 들떠 어찌할 바를 몰라 하지만, 절망의 늪에 빠지기도 하지만 나는 작가와 함께 가만히 그들을 지켜보고 있는 기분이다. 평론가 신수정씨도 그렇게 말하고 있지 않은가. "우리라고 <동사서독>을 소설로 만나는 기쁨을 가지지 말란 법은 없을 것이다. 인간의 사랑이란 모두가 시간 속의 재일 뿐이다. 이 소설이 그 사실을 다시 한번 확인시켜 주었다."
또 밤이었고, 가을이었다. 버리기에 좋았다.
가장 인상적인 한 구절...
"위로란, 알아서 무뎌지고 저절로 잊혀질 때까지의 과정 속에서, 적어도 이해받고 있다는 안도감을 가져다주는, 남이 나에게 또는 내가 남에게 해줄 수 있는 최소한의 배려이다. 그러니 남편의 무반응은 나에게 배려 같은 것이 필요할 리가 없다는 의견에 다름아니었다. 사실 그 위로란 건, 받는 사람이 아니라 하는 사람을 위한 것이라고 봐야 하는지도 모르겠다. 나는 네게 최선을 다하고 있다는 무의식적인 생색 말이다. 혹자는 그 기회를 빌려 간간히 쉼표 찍어 호흡을 늘여가며 의도적으로 약을 올리기도 한다. 그래도 상대방은 차마 화를 낼 수 없는 게 위로다."
또 밤이었고, 가을이었다. 버리기에 좋았다.
가장 인상적인 한 구절...
"위로란, 알아서 무뎌지고 저절로 잊혀질 때까지의 과정 속에서, 적어도 이해받고 있다는 안도감을 가져다주는, 남이 나에게 또는 내가 남에게 해줄 수 있는 최소한의 배려이다. 그러니 남편의 무반응은 나에게 배려 같은 것이 필요할 리가 없다는 의견에 다름아니었다. 사실 그 위로란 건, 받는 사람이 아니라 하는 사람을 위한 것이라고 봐야 하는지도 모르겠다. 나는 네게 최선을 다하고 있다는 무의식적인 생색 말이다. 혹자는 그 기회를 빌려 간간히 쉼표 찍어 호흡을 늘여가며 의도적으로 약을 올리기도 한다. 그래도 상대방은 차마 화를 낼 수 없는 게 위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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