보충수업 준비를 하느라
참고서들을 뒤적거리던
어느 날 오후

분주했던 손놀림도
무심히 내쉬던 숨도
마구 뒤엉켜 흘러가던 마음도 
멈춰버리게 했던 "시"

나를 가장 아프게 하는 
그래서
내가 가장 사랑하는 "시" 

올해도
다이어리 첫 페이지에
적어둔다.



황지우, <뼈아픈 후회>


슬프다
내가 사랑했던 자리마다
모두 폐허다.


완전히 망가지면서
완전히 망가뜨려놓고 가는 것 그 징표 없이는
진실로 사랑했다 말할 수 없는 건지
나에게 왔던 사람들,
어딘가 몇 군데는 부서진 채
모두 떠났다.


내 가슴속엔 언제나 부우옇게 이동하는 사막신전
바람의 기둥이 세운 내실에까지 모래가 몰려와 있고
뿌리째 굴러가고 있던 갈퀴나무 그리고
말라가는 죽은 짐승 귀에 모래 서걱거린다.


어떤 연애로도 어떤 광기로도 
이 무시무시한 곳에까지 함께 들어오지는 
못했다, 내 꿈틀거리는 사막이,
끝내 자아를 버리지 못하는 그 고열의 
신상이 벌겋게 달아올라 신음했으므로
내 사랑의 자리는 모두 폐허가 되어 있다. 

 
아무도 사랑해 본 적이 없다는 거
언제 다시 올지 모를 이 세상을 지나가면서
내 뼈아픈 후회는 바로 그거다.
내 누구를 위해 그 누구를
한번도 사랑하지 않았다는 거


젊은 시절, 내가 자청한 고난도
그 누구를 위한 헌신은 아니었다.
나를 위한 헌신, 한낱 도덕이 시킨 경쟁심
그것도 파워랄까, 그것마저 없는 자에겐
희생은 또 얼마나 화려한 것이었겠는가


그러므로 나는 아무도 사랑하지 않았다.
그 누구고 걸어 들어온 적 없는 나의 폐허
다만 죽은 짐승 귀에 모래의 말을 넣어주는 바람이
떠돌다 지나갈 뿐
나는 이제 아무도 기다리지 않는다.
그 누구도 나를 믿지 않으며
기대하지 않는다.
 

 

'카니발인생' 카테고리의 다른 글

산드라 블록 주연 <블라인드 사이드>  (0) 2010.04.27
뮤지컬 <모차르트>  (0) 2010.03.14
김진규 <달을 먹다>  (0) 2009.12.05
히가시노 게이고 <백야행>  (1) 2009.11.08
황인숙 <강>  (0) 2009.08.23
Posted by 에스메이

블로그 이미지
에스메이

태그목록

달력

 « |  » 2025.6
1 2 3 4 5 6 7
8 9 10 11 12 13 14
15 16 17 18 19 20 21
22 23 24 25 26 27 28
29 30

최근에 올라온 글

최근에 달린 댓글

글 보관함